Dongguan
The Opium War Museum
First Opium War (1839-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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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박물관 (鴉片戰争博物館)

아편전쟁박물관은 광주시 동쪽에서 약 79km, 동완시 호무진구촌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일찍 중국인민들이 영국의 아편을 몰수하고 태워버리던 곳이다. 19세기 20년대에 영국은 중국에 대량의 아편을 들여왔다. 민족영웅 림측서는 이곳에서 국내외를 뒤흔드는 아편을 소각하고 영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을 령도하여 중국근대사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1839년 6월 3일부터 25일가지 림측서는 몰수한 영국상들의 2만여 상자의 아편을 태워 버렸는데 도합 118만여kg에 달했다. 이 장거는 영국당국의 격노를 자아냈다. 이듬해 6월에 영국함대는 광주강면과 해구를 봉쇄하고 제1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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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민넷

The Opium War Museum

Between 1839 and 1842, British forces fought a war on behalf of drug traffickers. Their victory opened up the lucrative China trade to British merchants. This was all done with the full blessing of the British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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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National Army Museum


ⓗ First Opium War (1839-1842) / 1차 아편전쟁

1차 아편 전쟁 (1839-1842)

1차 아편전쟁은 청나라와 영국이 무역·주권 문제와 아편 밀무역 단속을 둘러싸고 충돌해 벌어진 전쟁이다. 당시 영국은 중국 차·비단·도자기 등을 많이 사 가면서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는 상황을 부담스러워했고, 그 과정에서 인도산 아편이 중국에 대량으로 유입되며 사회 문제가 커졌다. 이에 도광제는 임칙서를 광둥에 파견해 아편을 압수했고 1839년 호문에서 압수 아편을 공개적으로 폐기했다. 영국은 상인 재산 피해 보상과 통상 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1840년 무력 시위를 벌였고, 증기선·함포 등에서 우위를 가진 영국 해군이 해안과 주요 강 하구를 공략하고 중국 남북 물류의 핵심인 대운하 입구를 봉쇄하자 청나라의 경제는 마비 상태에 빠졌다. 육지 전투에서도 영국군이 난징까지 진격하자 청나라는 항복을 선언했다. 결국 1842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난징 조약이 체결하게 된다. 난징조약의 내용은 막대한 배상금 지급, 홍콩 할양, 광저우 외에 5개 항구 개방, 치외법권과 영국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자동으로 적용해 주는 최혜국 대우 등이 포함되었다.

First Opium War (1839-1842)

The First Opium War was a series of military engagements fought between the British Empire and the Qing dynasty of China between 1839 and 1842. The immediate issue was the Chinese enforcement of their ban on the opium trade by seizing private opium stocks from mainly British merchants at Canton and threatening to impose the death penalty for future offenders. Despite the opium ban, the British government supported the merchants' demand for compensation for seized goods, and insisted on the principles of free trade and equal diplomatic recognition with China. Opium was Britain's single most profitable commodity trade of the 19th century. After months of tensions between the two states, the Royal Navy launched an expedition in June 1840, which ultimately defeated the Chinese using technologically superior ships and weapons by August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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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Wikipedia







ⓟ Lin Zexu (1785-1850) / 임칙서


임칙서 (1785-1850)

임칙서는 청나라 말기,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아편 반대 운동을 이끌었던 강직한 정치가이자 민족 영웅이다. 임칙서는 중국 근대사의 비극인 '아편전쟁'의 도화선이 된 인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양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려 노력했던 선구적인 지식인이었다. 19세기 초,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 적자를 메우기 위해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대량으로 밀수출했고 이로 인해 중국의 은이 대량으로 유출되었고 국민들의 건강이 파탄에 이르자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광둥 지역에 파견하었다. 1839년 광둥에 도착한 임칙서는 외국 상인들로부터 2만 상자가 넘는 아편을 몰수했고, 이를 호문 해변에서 소금과 석회를 섞어 바닷속에 폐기 처분했다. 이 사건은 영국에 전쟁의 명분을 제공했고, 결국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 조정은 영국과의 협상을 위해 임칙서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 그를 먼 변방인 신장 위구르 지역으로 유배 보냈다. 억울한 처지였음에도 그는 유배지에서 수로를 정비하고 농지를 개간하며 민생을 돌봤다. 이후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가는 도중 세상을 떠났다. 임칙서는 영국군과 싸우면서 서양의 대포와 군함이 가진 압도적인 화력을 직접 목격한 후 서양의 신문과 서적을 번역하게 하여 정보를 수집했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 지리서인《해국도지》의 모태가 된 자료들을 정리했다. "오랑캐를 제압하기 위해 오랑캐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훗날 중국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Lin Zexu (1785-1850)

Lin Zexu, courtesy name Yuanfu, was a Chinese scholar-official of the Qing dynasty best known for his role in the First Opium War of 1839–42. He was from Fuzhou, Fujian Province. Lin's forceful opposition to the opium trade was a primary catalyst for the First Opium War. He is praised for his constant position on the "moral high ground" in his fight, but he is also blamed for a rigid approach which failed to account for the domestic and international complexities of the problem.[2] The Daoguang Emperor endorsed the hardline policies advocated by Lin, but then blamed Lin for the resulting disastrous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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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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