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토
유대인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강제한 도시의 거리나 구역을 가리킨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폴란드 총독부를 비롯한 동유럽 점령지의 도시들에서 부활시켜 유대인을 몰아넣을 수용구역으로 이용하면서 악명을 떨쳤다. 바르샤바 게토가 수용인구 45만 명에 달해 가장 컸고 우치에 20만, 르비우에 15만, 빌뉴스에 8만, 크라쿠프에 7만 명이 수용되었으며, 이들 대도시 외에 여러 중소도시에도 게토가 세워졌다. 이 게토와 이전의 역사적 의미의 게토의 다른 점은 역사적 게토는 유대인들을 유럽의 다른 토착 기독교도들과 분리시키기 위해 좁은 구역에서 거주하게 한 반면 나치가 부활시킨 게토는 이후에 있을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를 위해 세웠다는 점이다. 당연히 이전의 게토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인구 밀도가 높고 비위생적이었으며 사망률도 비할 수 없이 높았다. 게토에서 굶어죽거나 병사하지 않은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수용소로 끌려가서 학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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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etto Heroes Square
Situated in the Podgórze district, which in 1941 was turned into the Krakow Ghetto, the former Plac Zgody was designated 'Umschlagplatz' under the Nazi occupation, the place where the Jews had to congregate to be deported. In 1943, once the Ghetto had been emptied, the belongings which the Jews had managed to carry as they were herded around–and which they had been forced to abandon before beginning their last journey to Plaszow or Auschwitz–had accumulated. Wardrobes, suitcases, tables, chairs; in the square “an incalculable amount of furniture which had been carried backwards and forwards countless times was rotting”, according to Tadeusz Pankiewic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