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기축옥사
己丑獄事 (1589)

ⓗ Rebellion of Jeong Yeorip (1589) / 기축옥사 (己丑獄事)



기축옥사 (己丑獄事, 1589)

1589년 10월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3년여에 걸쳐 그와 관련된 1,000여명의 동인계가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발단은 1589년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과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 신천군수 한응인 등이 전 홍문관수찬이었던 전주사람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의 고변에서 열거된 정여립의 역모죄상은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와 진안·금구 등지를 내왕하면서 무뢰배와 공·사노비들을 모아 ‘대동계’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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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bellion of Jeong Yeorip (1589)

The rebellion of Jeong Yeo-rip in 1589, known in Korean as the Gichuk oksa, was one of the bloodiest political purges in Korea's Joseon Dynasty. Its scale was greater than all four of the notorious literati purges combined. At that time Joseon politics was dominated by conflict between Eastern and Western factions. Neo-Confucian scholar and Easterner Jeong Yeo-rip was accused of high treason, after which as many as 1,000 Easterners were killed or exi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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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g Yeorip (1546-1589) / 정여립



정여립 (鄭汝立, 1546-1589)

정여립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70년(선조 2년) 식년 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부수찬과 수찬 등을 지냈다. 정당은 서인이었으나 서인을 탈당하여 동인으로 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스승이었던 이이를 비판한 일로 서인의 반발을 샀다. 그후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성혼, 박순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정여립은 관직을 단념하고 낙향, 지역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대동계를 결성해 왜구 토벌에 앞장섰으나, 반역을 획책한다는 고발이 있어 피신하던 중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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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Wikipedia

Jeong Yeorip (1546-1589)

Jeong Yeo-rip was a Korean politician of the Joseon period. His pen name was Jukdo, and customary name was Inb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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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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