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Charles I of England
1600-1649
Share

Share X




찰스 1세 (1600-1649)

찰스 1세는 키가 작았으며, 늘 수줍음을 탔고 말이 적으며 내성적이었다.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고, 이 시각에 입권해 교권 강화는 곧 왕권 강화, 또 왕권 강화는 곧 교권 강화라는 입장이 강했다. 당시 왕족의 결혼이 그랬듯이 즉위 직후 정략결혼을 했는데 상대는 앙리 4세의 딸이자 루이 13세의 누이인 앙리에트 마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 데다가, 왕의 측근들은 프랑스에서 온 왕비를 홀대하도록 왕을 부추겼기에 초기에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러나 왕비의 반대파가 죽거나 실각한 후에는 부부 사이가 좋아졌으며 자식도 6명을 두었다. 찰스 1세의 치세는 국제 정세와 국내의 기독교 종파 간의 갈등, 의회와의 권력 분쟁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으며, 이후 내전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지도하는 의회군에게 패배하여 재판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자세히보기]

출처 : 나무위키

Charles I of England (1600-1649)

Charles was born into the House of Stuart as the second son of King James VI of Scotland, but after his father inherited the English throne in 1603, he moved to England, where he spent much of the rest of his life. He became heir apparent to the kingdoms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in 1612 upon the death of his elder brother, Henry Frederick, Prince of Wales. An unsuccessful and unpopular attempt to marry him to Infanta Maria Anna of Spain culminated in an eight-month visit to Spain in 1623 that demonstrated the futility of the marriage negotiation. Two years later, shortly after his accession, he married Henrietta Maria of France.

[Learn more]

Source : Wikipedia



ⓗ English Civil War (1642-1651) / 청교도 혁명



청교도 혁명

1642년부터 1651년까지 찰스 1세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와 잉글랜드 의회를 중심으로 한 의회파가 3차례에 걸쳐 벌인 대규모 내전이다. 공화정이 수립되었을 때 청교도식 법규를 기반으로 하여 통치했기에 청교도 혁명이라고도 불린다. 한때는 '청교도 혁명'으로 자주 불렸지만 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진지한 고찰에 들어간 20세기 후반부터 콘래드 러설 등 수정주의 성향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혁명성이 부정되고, 일반적으로는 잉글랜드 내전이라고 한다. 의회파의 승리로 찰스 1세는 처형당했고, 찰스 2세는 추방당했다. 그리고 의회파는 올리버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삼아 잉글랜드 연방을 세웠다.

[자세히보기]

출처 : Wikipedia

  • There's no registered comment

h·map story

my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