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옥균 (1851-1894)
김옥균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이자 개화파의 핵심 인물로 조선의 근대화를 주도하려 한 개혁운동가였다. 그는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김홍집,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과 서양의 문물을 배우며 조선의 개혁을 모색했다. 김옥균은 조선이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교적 신분제와 부패한 정치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했다. 그러나 당시 보수적인 정권과 청나라의 강한 영향력 때문에 그의 개혁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그는 1884년 일본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켜 3일 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근대 국가 건설을 시도했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정변이 실패한 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10년 동안 머물며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외교 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1894년, 청의 사주를 받은 홍종우에게 일본에서 암살되어 시신이 조선으로 옮겨진 뒤 능욕당했다. 김옥균은 당시에는 반역자로 여겨졌지만, 오늘날에는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와 개혁을 앞서 추진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Kim Okgyun (1851-1894)
Kim Ok-gyun was a reformist activist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of Korea. He served under the national civil service under King Gojong, and actively participated to advance Western ideas and sciences in Korea. The goal of the reform movement was to develop Korea in government, technology, and military by using foreign resources, so that Korea would become stable enough in time to withstand increasing foreign encroachment. Kim was assassinated in Shanghai, and later was given the posthumous title "Chung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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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 Okgyun's Historic Site / 김옥균 유허지

김옥균 유허지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옛 아산현 소재지 뒷동산에 위치한 김옥균 선생묘소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부합장묘로 일본 동경 아오야마 외인묘지(靑山外人墓地)에서 1914년 9월 11일에 아산으로 이장되었다. 구한말의 정치가이자 개화운동가였던 김옥균의 호는 고균, 시호는 충달공으로 고종 9년(1872)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은 호조참판에 이르렀으며 1884년 조국 개화를 위해 갑신개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빈객이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조선 태종대(1413년)에 건립되었고 1834년 중건되었다.
[자세히보기]출처 : 아산시청
ⓗ Gapsin Coup (1884.12.4) / 갑신정변

갑신정변 (1884.12.4)
갑신정변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의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정치적 쿠데타 사건이다. 이들은 청나라의 간섭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일본의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 낙성식을 기회로 온건 개화파 및 민씨 정권의 수구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급진 개화파는 입헌 군주제 수립을 목표로 청과의 종속 관계 청산, 문벌 폐지,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재정의 호조 일원화 등 14개조 정강을 발표하며 개혁을 추진했지만, 정변 발생 3일 만에 청나라 군대의 개입과 조선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김옥균 등 주도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많은 개화파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결국 일본은 한성 조약을 통해 조선에게 배상금을 받고 청나라와는 톈진 조약을 맺어 양국 군대의 철수와 파병 시 상호 통보를 규정하여 조선에 대한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 경쟁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갑신정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이 자주적 근대화를 시도한 최초의 정치 혁명으로 평가되며 이후 개혁운동과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Gapsin Coup (1884.12.4)
The Gapsin Coup was a failed three-day coup d'état that occurred in Korea during 1884. Korean reformers sought to initiate rapid changes within the country, including eliminating social distinctions by abolishing the legal privileges of the yangban class. The coup d'état attempt, with Japanese support, began on December 4, 1884, with seizure the royal palace in Seoul and the killing of several members of the pro-Chinese conservative faction. However, the coup was eventually suppressed by a Chinese garrison stationed in the country, thwarted by the Chinese actions some of the pro-Japanese faction leaders found exile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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