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nju
Siege of Jinju
Kim Simin (1592), Hwang Jin (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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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대첩 (1592)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은 부산을 거쳐 한양까지 점령하며 빠르게 북상했다. 이후 그들은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해 군량미를 확보하려 했는데, 이를 막기 위해 조선군은 경상도 서부의 요충지인 진주성을 지키기로 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점령하면 전라도 진입이 쉬워질 것이라 판단하고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약 2만여 명의 병력을 보냈다. 반면 조선군은 김시민을 중심으로 약 3,800명에 불과했지만, 의병과 백성들의 협력으로 방어 준비를 철저히 했다. 일본군은 여러 차례 총포와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오르려 했지만, 조선군은 끊임없는 포격과 반격으로 이를 막아냈다. 전투는 6일간 이어졌으며,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결국 퇴각했다. 김시민 장군은 전투 중 총상을 입었으나 끝까지 지휘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의 용기와 리더십은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수적으로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준비, 전략적 지휘, 백성들의 협력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1차 진주대첩의 승리는 임진왜란 초반 연이은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졌던 조선군과 백성들에게 커다란 희망과 자신감을 주었다. 하지만 이 승리 이후 일본군은 진주대첩의 복수를 위해 1593년 다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공격했고, 이때 일어난 2차 진주대첩에서는 조선군이 패배하고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Siege of Jinju (1592)

The Siege of Jinju was one of two battle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Korea; the first in 1592, and the second in 1593. The second battle of Jinju did not go as well for the Koreans, and it fell to the Japanese. The Japanese first advanced and fired a thousand shots at Jinju in an attempt to frighten the defenders into retreat. This didn't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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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Wikipedia







ⓟ Kim Simin (1554-1592) / 김시민



김시민 (1554-1592)

임진왜란 당시 진주판관이던 김시민은 일본군이 남해안을 따라 북상하자 진주성을 방어하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1592년 일본의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2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했을 때, 김시민이 지휘하던 조선군은 약 3천8백 명뿐이었다. 그는 적의 수가 많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성벽을 보수하고 화살, 화포, 돌, 끓는 물 등을 준비해 철저한 방어전을 펼쳤다. 전투는 6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김시민은 성문이 불타고 병사들이 지쳐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직접 화살과 포를 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결국 일본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고, 조선군은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김시민은 전투 중 총상을 입은 뒤 부상이 악화되어 전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국했다.


Kim Simin (1554-1592)

Gim was made an official in Jinju Castle in 1591, and with the sudden death of the castle’s guardian Yi Gyeong, and the beginning of the Imjin Wars he came to be the commander of the fortress. From there, he acted decisively to fortify the castle. During the Wars, he defeated Japanese forces at Sacheon and Goseong and captured the Japanese commander Pyeongsotae at Jinhae. With this merit he was appointed Right Gyeongsang provincial army district Commande and once again defeated the Japanese at Geum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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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Second Siege of Jinju (1593.7.19-7.27) / 2차 진주성전투



2차 진주성전투 (1593.7.19-7.27)

일본군은 1차 진주대첩의 복수를 위해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 주요 장수들이 참여한 약 9만 명의 대군을 동원했다. 반면 조선군은 병사 약 3,800명과 의병, 민간인 수천 명이 함께 성을 지켰다. 이때 조선군을 지휘한 인물은 최경회, 김천일, 황진 등이었다. 조선군은 화살과 돌, 끓는 물 등을 이용해 격렬히 저항했고, 백성들도 물을 나르고 돌을 던지며 끝까지 싸웠다. 하지만 일본군은 인원과 화력에서 압도적이었고, 특히 성 바깥에서 강을 막아 물길을 돌리고, 성벽을 무너뜨리는 등 체계적인 공성전을 벌였다. 결국 1593년 6월 29일, 6일간의 격전 끝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 안의 조선군과 백성들은 끝까지 싸우다 대부분 전사했고, 일부는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전사자 수는 약 6만~7만 명에 달했다.


The Second Siege of Jinju (1593.7.19-7.27)

The Second Siege of Jinju was a battle during 1593 in Hideyoshi's invasions of Korea at Jinju Fort. It occurred from 20 July to 27 July and ended in the massacre of the entire garrison and a substantial portion of the entire population. This became the origin of the Uwajima Ushi-oni Festival in Uwajima, Ehime Prefecture,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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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wang Jin (1550-1593) / 황진



황진 (黃進,1550-1593)

임진왜란 전반기에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막아 엄청난 공훈을 쌓은 명장. 시호는 무민(武愍). 통칭 무민공 황진. 용인 전투에서 패하였으나 패잔병들을 수습해 전력을 보존하였고, 권율과 함께 이치 전투에서 왜군을 방어하여 승리하였다. 이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응전하다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초반 일본군 육군의 계획을 망가뜨린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에서 용맹으로 이름을 떨친 대표적인 장수로, 같은 때 무과급제한 이종인과 함께 조선군 내에서도 무용이 매우 뛰어났다고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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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ikipedia

Hwang Jin (1550-1593)

Hwang Jin was a general during Japanese invasions of Korea. His courtesy name was Myeongbo and his posthumous name was Mumin. He is best known for his defense at the castle of Jinju at the Siege of Jinju (1593). There were two battles of Jinju, the first was a great victory for the Koreans while at the second, the Japanese captured the castle, with Hwang Jin and the entire Korean garrison killed. Hwang Jin was killed by two arquebuse bull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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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KOREA TOURISM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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