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1924-2009)
김대중은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나 젊을 때부터 정치에 뛰어들어 박정희와 전두환 등 군사독재 정권과 맞서며 한국 민주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여러 번 대통령 후보에 나섰지만 선거마다 군사정권의 방해를 받았고, 심지어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납치당해 죽을 뻔하기도 했으며, 전두환 정권 때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는 등 극심한 탄압을 당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정치 활동이 다시 가능해지면서 그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침내 승리해 대한민국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경제가 큰 위기를 맞고 있던 IMF 외환위기 속에서 구조조정과 금융개혁을 추진해 경제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했고, 정보통신(IT) 산업을 집중적으로 키워 인터넷·휴대폰 등 첨단 기술이 빠르게 성장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북한과의 긴장을 줄이기 위해 햇볕정책이라는 화해·협력 정책을 펼쳤고, 2000년에는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직접 만나며 남북 관계를 큰 폭으로 개선했다. 이 공로로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Kim Dae-jung (1924-2009)
Kim Dae-jung was a South Korean politician who served as President of South Korea from 1998 to 2003. He was a 2000 Nobel Peace Prize recipient, the only Korean Nobel Prize recipient in history. He was sometimes referred to as the "Nelson Mandela of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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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dnapping of Kim Daejung (1973.8.8) /김대중 납치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1973년 8월,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은 일본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박정희 정부의 독재를 비판하고 한국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호텔에서 강제로 끌려 나와 납치되었다. 그는 눈을 가린 채 줄로 묶인 상태로 차와 배를 타고 이동했고, 납치범들은 그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김대중은 배 위에서 "유언을 하라"고 협박을 들었을 만큼 목숨이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당시 일본 정부와 미국 정부가 김대중 실종을 이상하게 여기고 항의하면서 납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한국으로 몰래 데려와 서울 근처에 버렸고, 그는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건이 드러나자 국제 사회에서는 한국 정부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크게 문제 삼았고, 일본과 한국의 외교 관계도 큰 충격을 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처음에는 부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앙정보부가 개입했다는 사실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 사건은 독재 정권이 정치적 반대파를 없애기 위해 어떤 무리한 행동까지 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Kidnapping of Kim Dae-jung
The South Korean dissident leader Kim Dae-jung, later president of South Korea, was kidnapped on August 8, 1973, in Tokyo, Japan. At around 13:19, Kim was abducted by a group of unidentified agents as he walked out of the room after the mee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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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ntenced to death on charges of sedition (1980)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1980년 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군사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정치인과 시민들의 활동을 강하게 제한하고 있었는데, 이때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김대중은 많은 시민들에게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신군부 입장에서는 큰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그러자 신군부는 김대중이 학생들과 함께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나라를 뒤집으려 했다고 주장하며 그를 내란음모혐의로 체포했고, 동시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도 함께 잡혀가 고문을 당하거나 억울하게 조사받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김대중이 폭동을 계획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었고, 이는 신군부가 자신들의 권력 장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조작 사건이었다.
Sentenced to death on charges of sedition
In 1980, Kim was arrested and sentenced to death on charges of sedition and conspiracy in the wake of another coup by Chun Doo-hwan and a popular uprising in Gwangju, his political strongh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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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th President of South Kore (1998.2) / 15대 대통령 취임

ⓗ June 15th North–South Joint Declaration (2000.6.15) / 6·15 남북 공동선언

6·15 남북 공동선언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갈등을 줄이고 평화를 만들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고, 남한과 북한의 정상이 역사상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회담을 했다. 그 결과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는데, 이 선언은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앞으로 전쟁이 아닌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선언의 핵심 내용은 다섯 가지였는데, 남과 북은 통일을 서둘러 강제로 이루려 하지 않고,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며 자주적(스스로의 힘으로)으로 통일을 추진하기로 했고, 남한의 '연합제' 구상과 북한의 '연방제' 구상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통일 방식에 대한 대화도 계속하기로 했다. 또한 남과 북은 오랫동안 떨어져 살던 이산가족 상봉을 정례적으로 추진하기로 했고, 경제·문화·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약속하면서 실제로 금강산 관광, 경의선 철도 연결, 개성공단 사업 같은 여러 협력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 선언은 남북 관계를 크게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 것 자체가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이 선언과 남북 화해 정책(햇볕정책)을 추진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June 15th North–South Joint Declaration
The June 15th North–South Joint Declaration was adopted between leaders of North and South Korea in June 2000 after various diplomatic meetings between the North and S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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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bel Peace Prize (2000.12.10) / 노벨 평화상

ⓢ Birthplace of President Kim Daejung / 김대중 대통령 생가

김대중 대통령 생가
하의도(신안)가 세간의 큰 관심을 끌게 된 사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파란과 곡절을 상징하는 "인동초, 김대중"이란 거목을 낳은 고장이라는 것이다. 지난 1992년 대통령 선거 무렵에는 그의 생가 집터가 있는 후광리에 수백명의 국내기자와 외신기자들이 몰려드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생가도 지금은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자세히보기]출처 : 한국관광공사